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좋은 대화 상대를 만나면 내 생각이 정리되고, 미처 몰랐던 부분을 짚어주면서 아이디어가 한 단계 올라간다. 반대로, 뭘 말해도 "그렇지, 맞아"라고만 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기분은 좋지만 생각이 발전하지 않는다.

AI와도 그런 경험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얼마나 잘할지 반신반의했다. AI는 기본적으로 듣기 좋은 말을 한다. "좋은 생각입니다", "맞습니다", "그 방향이 좋은 것 같습니다." 뭘 말해도 동의부터 하니까,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서로 생각을 부딪히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할루시네이션도 심하고, 약간 아부하듯이 사용자에게 맞추는 느낌도 있었다. "이건 이런 거 아니야?"라고 물으면 "아이, 그 말씀도 맞습니다"라며 바로 생각을 바꾸고, 내가 다시 원래 의견을 말하면 또 "그것도 맞습니다"라고 한다. 주인님 말씀이 다 맞다는 식이다.

그래서 직접 해봤다.

"나한테 자꾸 맞추지 말고, 정말 맞을 때만 맞다고 해. 아닐 때는 '이거 아닌 거 아닙니까?'라고 나를 챌린지해줘야 내가 똑바로 할 거 아니냐"라고 지시를 했다.

결과가 꽤 놀라웠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봐야 되지 않나요?"라면서 내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반박을 해도 쉽게 물러나지 않고 자기 논리를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약간 기분이 나쁠 정도로 챌린지를 당했다. 이 정도일줄은 예상 못했는데.

이런 대화를 몇 번 하다 보니, 똑똑한 동료와 토론할 때처럼 내 생각이 더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 내가 생각을 느슨하게 가지고 있던 부분에서 AI가 "그 논리가 약한데요"라고 짚으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혼자 머릿속으로 맴돌던 아이디어가 이 과정을 거치면서 더 단단해졌다.

핵심은 지시의 방식이었다. AI에게 어떤 역할을 요청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다. 아부하는 비서를 원하면 아부를 해주고, 비판적인 동료를 원하면 비판적으로 바뀐다. 이건 AI의 한계가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지시를 하느냐의 문제다.

아는 만큼 쓸 수 있다

원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게 AI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AI에게도 더 좋은 지시를 할 수 있고, AI도 더 좋은 답을 내준다. 막연하게 "좋은 전략 짜줘"라고 하면 막연한 답이 오고, "이런 상황에서 이런 제약 조건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옵션 중 어떤 게 나은지 분석해줘"라고 하면 분석다운 답이 온다.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일 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일하는지를 많이 보면 "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면서 내가 일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걸 적용하면 AI와 일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실제로 내 일을 개선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경쟁적으로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유튜브 영상도 넘쳐나서 가끔은 보기도 싫고 지친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자기 스타일에 맞는,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성과 맞는 사람이 소개해주는 방식은 좀 따라가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모든 걸 다 볼 필요는 없지만, 내가 배울 수 있는 사람의 방식은 챙겨보면 도움이 된다.

말로 하고, AI가 정리하는 시대

요즘은 보이스 딕테이션 소프트웨어도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여러 서비스가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쓰는 것 중 하나인 Wispr Flow를 나도 구독하여 쓰고 있다. 인식률이 좋고 사용감이 편하다. 타이핑 치느라 팔이 아팠는데 이제 그런 고통이 없다. 속도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생각나는 대로 빨리 말로 쏟아내고, 대강 써놓은 글을 AI에게 넣어서 내 스타일대로 정리해달라고 하면 된다. 타이핑을 아무리 빨리 친다 해도 말하는 것보다 몇 배 느리니까,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십 몇 년 전에 커리어 강의를 하고 돌아와서, 강의에서 했던 좋은 생각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글로 남겨야겠다 싶어서,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하루종일 밥만 먹고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써서 백 페이지를 이틀만에 쓴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이후 최근까지 그 정도의 몰입을 거의 경험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제 그 정도의 생산성이 다시 가능해졌다.

녹음하면 다 받아쓰기가 된다. 거기다 내가 쓴 글을 프로젝트 파일로 올려놓고 "이 스타일대로 정리해줘"라고 하면, 내가 말하듯 글쓰듯 하는 것을 별로 힘들지 않게 해준다. 속도는 비교도 안 된다.

옛날 미국 드라마 수트(Suits) 같은 데서 보면, 변호사가 딕터폰에 생각난 것을 잊기 전에 수시로 녹음해서 비서에게 주고 타이핑을 시키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 비서가 AI다. 녹음하면 AI가 다 받아쓰기 해주고, 줌이나 구글 밋 같은 화상 회의에서도 딕테이션 소프트웨어가 자동으로 같이 떠서 옆에서 다 듣고 정리해준다. 회의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주고, 다음에 뭘 해야 되는지 알려주고, 미리 세팅해놓으면 관련된 사람들에게 메일까지 보내준다. 회의를 정리할 사람도 필요 없고, 엉뚱하게 이해해서 잘못 정리될 일도 거의 없다.

수족이 고생하지 않는 좋은 세상이다.

머리만 잘 쓰면 되는 시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아웃소싱하지 않는 이상, 머리만 잘 쓰면 꽤나 빨리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은 확실하다. 이게 사람들한테 당연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로 느껴보면 좀 놀랍다. 약간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체감하는 것 사이에 꽤 큰 갭이 있다.

그래서 "AI가 사람만큼 할 수 있을까?"는 이제 맞는 질문이 아니다. 당연히 사람만큼 할 수 있고, 많은 영역에서 사람보다 더 잘한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뭘까. 어떻게 하면 AI를 쓰면서 다른 사람들이나 AI로부터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방식을 배우고, AI와 함께 서로 수준을 높여가면서 점점 할 때마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나도 더 똑똑해지고, AI도 내가 제공하는 맥락 덕분에 더 똑똑해지는 순환. 그 practice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AI가 더 똑똑해지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AI와 일하는 방식을 더 똑똑하게 만드는 것. 그 시작은 "나한테 맞추지 말고 챌린지해"라는 한 줄의 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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