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내가 다니던 조직의 총괄 임원께서 종종 하시던 말씀이 있다. "혼자 잘하면 되는 일은 쉬운 일이고, 주니어의 일이다.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 시니어의 일이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분은 자기가 직접 잘하는 것보다 남을 움직여 잘하게 만드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조직에서 위로 올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무가 줄어든다. 대신 결정하고, 조율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일이 늘어난다. 코드 한 줄, 슬라이드 한 장을 직접 만드는 시간보다 누구에게 무엇을 맡길지, 어떤 방향으로 갈지를 정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나도 그 변화를 겪었다. 처음엔 어색했다.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줄어드니 내가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율과 판단도 결과물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구분이 흔들린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드는 의문은 이것이다. 매니저가 반드시 실무자(IC, Individual Contributor)보다 시니어인가? 한국 조직에서는 오랫동안 그렇게 여겨졌다. 일을 잘하면 팀장이 되고, 팀장을 잘하면 임원이 된다. 직급이 곧 경험의 증명이고, 영향력의 크기였다. 하지만 미국 IT 회사에서 일하면서 나는 다른 풍경을 봤다. 매니저보다 연봉이 높은 시니어 엔지니어가 있었고, 사람을 관리하는 길과 전문성을 깊게 파는 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길 모두 시니어로 가는 길이었다.
그 모델이 한국에도 조금씩 들어왔지만, 여전히 많은 조직에서는 나이와 직급이 시니어의 기준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종종 불편한 인식과 짝을 이룬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연봉은 훨씬 많이 받으면서 젊은 사람들보다 느리고 성과는 못 낸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나를 돌아보게 된다. 동시에 그 말이 너무 단편적이라고 느낄 때도 많다. 한 사람이 쌓아온 판단력과 관계, 위기를 넘긴 경험은 숫자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더 마음에 걸리는 건 다른 쪽이다. 왜 경기가 어려워지면 신입사원의 자리가 가장 먼저 사라지는가. 기업들은 채용을 줄일 때 거의 예외 없이 신입 공채부터 손을 댄다. 가르쳐야 할 사람보다, 당장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 결과 막 사회에 나오는 젊은이들은 첫 발을 디딜 곳이 없다. 경험을 쌓을 기회 자체가 줄어드니, 시간이 지나도 시니어로 자라기 어려운 구조가 된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짊어지게 될 비용이다.
그렇다면 경험이라는 건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걸까. 분야에 따라 다르긴 하다. 의사, 변호사, 건축가처럼 한 사람의 판단이 누군가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분야에서는 경험의 무게가 무겁다. 반면 디지털 경제가 본격화되면서, 어떤 분야에서는 오랜 경험보다 고객의 반응 데이터를 빠르게 모으고 해석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한 사람의 직관 20년치보다, 한 달치 행동 데이터가 더 정확한 답을 주는 영역이 늘어난 것이다. 그때 이미 시니어의 정의는 한 번 흔들렸다.
이제 AI의 시대다. 인류가 쌓아온 대부분의 지식과 사례를 학습한 모델이, 평균적인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한다. 글을 쓰고, 코드를 짜고, 자료를 분석하고, 전략 옵션을 정리한다. 내가 30대에 며칠씩 걸려서 했던 일이, 지금은 잘 짜인 프롬프트 하나로 한 시간 안에 끝난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도구를 매일 쓰면서 나는 가끔 멍해진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것은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그래도 며칠 사용해 보고 나니 조금씩 정리가 된다. AI가 잘하는 건 이미 답이 있는 문제를 빠르게 푸는 일이다. 정해진 방식, 알려진 패턴, 일반화된 지식. 그 영역에서 사람이 AI보다 빠르거나 정확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남는 일은 무엇인가. 내 잠정적인 답은 이것이다. 무엇을 풀어야 하는지 정하는 일, 어떤 답이 우리 상황에 맞는지 가려내는 일, 그리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일.
이렇게 보면 시니어의 정의도 조금씩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엔 "더 많이 알고 더 잘하는 사람"이 시니어였다. 앞으로는 "더 좋은 질문을 던지고, 더 분별 있는 판단을 내리고, 더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시니어가 되지 않을까. 그건 나이와 꼭 비례하지 않는다. 직급과도 비례하지 않는다. 어쩌면 입사 3년 차도 어떤 영역에서는 시니어일 수 있고, 20년 차도 어떤 영역에서는 다시 주니어로 돌아가야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분명해진다. 나는 지금 어떤 영역에서 시니어이고, 어떤 영역에서 다시 주니어인가. 1998년에 일을 시작했으니 곧 30년이 된다. 그 시간은 분명 자산이지만, 새 시대의 자산이 되려면 다시 배우는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요즘 자주 느낀다. 옛날 방식으로 시니어 행세를 하려는 순간, 가장 빨리 낡는다.
부끄럽지만 그게 지금의 내 자리다. 어떤 날은 그동안의 경험을 신뢰하며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고, 어떤 날은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새로운 도구 앞에서 더듬거린다. 그 두 자리를 오가는 게 어색하지 않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이 시대에 시니어로 남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