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오랜 지인 몇 분과 각자의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회사 상황 이야기로 흘러갔다. 대기업에 있는 분,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분, 사내 AI 팀을 꾸리고 있는 분. 업종도 규모도 다른데 고민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AI agent 시대에 우리 팀의 업무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비용 효율화와 생산성 향상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대기업도 스타트업도 "AI 컴퍼니"를 지향한다고 한다. AI를 활용해서 뭔가를 효율화하겠다는 방향은 정해졌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라는 것이었다.
이 대화들을 하면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내 생각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도록 딜리버리가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제품을 만들면 알아봐 줄 것이라고. 실력으로 승부하면 된다고. 컨설팅 회사에서 영업은 파트너들의 영역이었고 나는 분석과 딜리버리에만 집중했다. 테크회사들에서는 업계를 이끄는 제품이 있으니 알리는 것 자체가 큰 어려움이 아니었고, 제품 안에 스스로 퍼지는 마케팅적 요소를 넣어서 해결하기도 했다. 아마존에서 영업도 해봤고 내 사업에서도 영업을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결국 좋은 걸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늘 더 강했다.
그런데 요즘 이 생각이 흔들린다.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바이브코딩이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다. 코딩을 모르는 사람이 AI에게 말로 설명해서 앱을 만드는 시대. 몇 달 전 이 뉴스레터에서도 소개했듯이 만드는 것의 진입 장벽이 급격히 낮아졌다.
그런데 만드는 허들이 낮아진 만큼, 만든 것을 알리는 건 훨씬 더 어려워졌다. 앱스토어에 들어가보면 비슷한 앱이 수백 개다. 도서 시장도 마찬가지다. 매년 수만 권이 출판되지만 독자에게 닿는 책은 극소수다. 바이브코딩으로 만든 SaaS도 같은 운명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딜리버리의 가치가 줄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딜리버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만들고 팔 곳을 찾으면 늦다. 고객이 먼저다.
이건 교과서에서 수없이 읽은 이야기다. 그런데 막상 내가 당사자가 되니까 순서가 뒤바뀌었다. 뭔가를 만들어놓고 "이제 누구에게 팔지?" 하고 있었다. 솔직히 인정한다.
지인들과 이야기하면서 다시 깨달은 건 이렇다. 그분들 회사에서 AI를 어떻게 도입할지 논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아요?"라고 말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을 먼저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을 파악한 후에 제공하는 것. 제품을 완성한 후에 시장을 찾으러 다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만들 수 있는 기술은 점점 누구나 접근 가능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산은 기술력이 아니라 고객과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고객을 쥐고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으니까.
완벽하게 만들려다 늦어지는 것도 같은 문제다.
AI로 업무를 효율화하겠다고 하면 대부분 완벽한 자동화를 떠올린다. SaaS로 만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손이 안 가게 하고, 대시보드까지 만들어서 관리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완벽하게 자동화하려다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고, 비즈니스 환경이 바뀌면 다시 처음부터 손봐야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기술적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정작 사용자에게 가치가 전달되는 시점은 계속 늦어진다.
나도 Claude Code로 SaaS를 만들며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계속 에러를 고치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수정하고, API 비용도 걱정하면서. 처음엔 모든 걸 완벽하게 자동화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다음 주에 바뀔지도 모르는 걸 고치는 데 몇 주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반자동이라도 빨리 만들어서 바로 성과를 보게 하는 편이 낫다. 사용자가 중간중간 손으로 개입해야 하더라도, 그 결과가 이전보다 확실히 나아졌다면 그게 진짜 혁신이 아닐지. 완벽한 시스템은 그 다음에 고민해도 된다.
이것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완벽한 딜리버리에 매달리느라 고객에게 가치가 전달되는 타이밍을 놓치는 것.
결국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나도 20년 넘게 여러 회사에서 일하며 "일을 잘한다는 것"이 뭘까에 대해 생각해왔다. AI 시대에도 이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요즘 더 느낀다. 좋은 질문을 던지고, 고객의 진짜 문제를 파악하고, 상대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능력. 사람에게든 AI에게든 동일하게 적용된다.
딜리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건 아니다. 다만 고객을 이해하고 그 곁에 있는 사람이, 기술만 가진 사람보다 대체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요즘 점점 강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