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나는 증권사에서 일했다. 그때 맡은 일 중에 투자성과보고서를 만드는 게 있었다. 분기마다 수십 개의 계좌와 상품의 수익률을 계산하고, 정해진 양식에 맞춰 표와 문장을 채우는 일이었다. 지루하고, 틀리기 쉽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10명이 붙어 2주는 매달려야 끝났다. 분기가 돌아올 때마다 그만큼의 시간이 그 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반복이 싫었다. 매번 같은 순서로 같은 계산을 하는데, 이걸 왜 사람이 손으로 하나 싶었다. 그래서 선배의 도움을 받아 3일 동안 자동화를 만들었다. 데이터를 넣으면 계산과 양식 채우기까지 한 번에 끝나도록 짰다.

그 보고서가 다루는 계좌에는 시세가 바로 나오지 않는 상품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지난 수익률을 내려면 그런 상품의 값부터 따로 계산해 매겨야 했고, 그 계산이 제일 오래 걸렸다.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이라는, 나올 수 있는 경우를 수천 번 무작위로 돌려 보고 그 결과를 평균 내 값을 가늠하는 방법이었다. 손으로는 엄두가 안 나는 계산이라, 이건 나 혼자 풀지 못해 선배가 붙어 같이 잡았다. 그 부분이 풀리고 나서야 나머지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10명이 2주 매달리던 일이, 자동화가 돌아가자 한 사람이 처리하면 되는 일로 줄었다. 비용으로 치면 70%가 줄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자동화를 만들라는 지시도, 그걸로 인정받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냥 그 반복이 싫어서 손을 댄 것뿐이다. 다 만들어 결과를 보여 줬을 때 다들 반가워했다.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일이 없어진다고 누가 회사를 나갈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다들 다른 할 일이 많았다. 그 보고서 만드는 일은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던 잡일이었다. 하기 싫은데 안 할 수는 없어서 하던 일. 그게 없어졌으니 다들 좋아한 건 당연했다.

그때는 그냥 넘어갔는데, 지나고 보니 여기에 생각할 게 있었다. 같은 자동화라도 무엇을 없애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달라진다. 그 보고서 일은 아무도 아끼지 않던 잡일이라 없어지니 다들 홀가분해했다. 만약 그게 누군가가 자기 실력이라고 여기던 일, 그 일을 할 줄 알아서 대접받던 일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편해지는 건 같아도, 그 사람은 홀가분한 게 아니라 허탈했을 것이다. 자기 일이 없어졌는데 옆에서 다들 잘됐다고 하는 자리만큼 허무한 것도 없다.

손이 빠르기로 소문난 사람, 그 계산만큼은 자기가 제일이라던 사람을 떠올려 보면 안다. 그런 사람 앞에서 버튼 하나로 같은 결과가 나오면, 편해졌다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없어진 게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 자동화를 짤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 계산을 다룰 줄 아는 선배가 있어야 했고, 나도 그 일을 해낸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다. 잠깐이지만 뿌듯했다. 지금은 다르다. 그때 선배까지 붙어 3일에 걸쳐 만든 걸, 지금은 AI로 반나절이면 만든다. 코드를 직접 짜는 게 아니라 원하는 걸 말로 설명하고 로직이 맞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코드를 짤 줄 몰라도, 그 업무를 10년 판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크게 줄어든 건 그 로직을 짜는 시간이다. 정작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결과를 인쇄해 뽑는 데는 지금도 시간이 든다.

20년 전 내가 없앤 건 아무도 아끼지 않던 잡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AI가 하는 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 자기 실력이라 여기던 일, 그때 그 자동화를 짜던 나 같은 사람의 일까지 닿는다. 그러니 나는 양쪽을 다 겪은 셈이다. 남의 잡일을 없애 다들 좋아하게 만든 쪽에도 있었고, 이제는 내가 오래 쌓은 능력이 반나절짜리가 되는 걸 보는 쪽에도 있다. 앞의 자리에서는 자동화가 그저 좋기만 했다. 뒤의 자리에 서 보고 나서야 생각이 좀 더 복잡해졌다.

요즘 기업에서 AI 도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앉으면 그 생각을 한다. 회의실에서 나오는 건 대개 효율 이야기다. 이 일을 AI가 하면 얼마가 준다는 계산. 그 계산은 맞다. 다만 나는 한 가지를 더 본다. 지금 없애려는 그 일이 하는 사람에게 잡일인지, 아니면 그가 실력이라 여기는 일인지. 같은 도구인데 앞의 경우엔 다들 반가워하고, 뒤의 경우엔 누군가는 허탈해한다. 그 차이는 효율 숫자에 안 잡힌다. 도입을 밀어붙일 때 조용히 버티는 사람은 대개 잡일을 하던 사람이 아니다. 그 일을 제일 잘해서 인정받던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이건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서 있던 자리의 문제다. 그걸 모르고 숫자만 들이밀면 도입은 겉으로만 되고 속으로는 안 된다.

20년 전 그 사무실에서 없앤 건 잡일이라 다들 좋아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해 보였는데, 지나고 보니 자동화를 반기느냐 허탈해하느냐는 그 일이 남의 일이냐 내 일이냐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반기는 그 자동화는, 누구의 일을 없애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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